소도시 속 ‘일터’를 꿈꾸다: 보성을 향한 첫 발걸음
디지털 노마드로 산다는 것은 어디서든 일할 수 있다는 가능성과 동시에, 어느 공간에서도 외로움을 느낄 수 있다는 양면성을 지닌다. 나는 서울에서 콘텐츠 마케팅 프리랜서로 활동하며 5년 가까이 원격근무를 지속해왔다. 그러나 점점 화면 속 삶과 주변 환경의 온도차에 피로함을 느끼게 되었고, 결국 “도심 밖에서도 충분히 일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구체적인 실행으로 이어졌다. 그렇게 선택한 도시가 바로 전라남도 보성이다.
보성은 녹차로 유명한 곳이다. 관광지로 잘 알려져 있지만, 장기 체류지로서의 가치는 상대적으로 조명받지 못하고 있다. 그렇기에 더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과도한 상업화가 덜 되어 있고, 실제 지역민들과 어우러진 일상 속에서 진짜 ‘조용한 삶’을 실현해볼 수 있다는 기대가 있었다. 보성은 소리 없는 도시였다. 그 조용함이 오히려 나에게는 강한 몰입력을 제공해주는 '생산적인 배경음'처럼 느껴졌다.
보성에서의 일상: 디지털 워크에 적합한가?
보성에 도착해 가장 먼저 확인한 것은 인터넷 속도였다. 내가 머문 곳은 보성읍 중심지에서 약간 떨어진 작은 민박형 숙소였다. 인터넷은 광랜이 설치되어 있었고, 다운로드 약 220Mbps, 업로드 약 180Mbps로 안정적이었다. Zoom을 통한 실시간 회의, Google Drive 기반 자료 업로드, Notion을 이용한 프로젝트 관리 모두 문제없이 수행할 수 있었다. 특히 아침 7시부터 해가 지는 저녁까지 창문 너머로 보이는 녹차밭 풍경은 내게 일종의 시각적 힐링이 되어주었다.
작업 공간은 숙소 내 테이블이 부족했기 때문에, 일정 기간 카페를 병행해서 활용했다. 보성에 있는 ‘그린카페’나 ‘차밭다원 전망대 근처 찻집’은 조용하면서도 노트북 사용에 제약이 없어 자주 찾았다. 이곳에서 일하면서 특별했던 점은 바로 ‘소리의 부재’였다. 도심에서는 느낄 수 없는 정적, 그러나 그 정적이 주는 집중감은 상상 이상이었다. 스마트폰 알림조차 줄여놓은 채로 몇 시간을 몰입하게 되는 경험은 도심에선 쉽게 얻을 수 없는 특권이었다.
일과 삶의 경계를 재설정하다: 자연과 함께하는 업무 루틴
보성에서의 하루는 서울과 완전히 다른 구조로 흘러갔다. 새벽 6시 기상, 간단한 스트레칭 후 산책로를 따라 녹차밭 가장자리를 걷는다. 이른 아침 공기를 마시며 걷는 20분의 시간은 뇌를 깨우고 기분을 안정시켜 주었다. 이후 아침 8시부터 업무를 시작했고, 오전 중 가장 집중도가 높은 시간대에 콘텐츠 기획과 자료 작성 업무를 집중적으로 처리했다.
점심은 지역 식당에서 혼밥으로 해결했다. 인심 좋은 할머니들이 운영하는 백반집은 가격이 저렴하면서도 건강한 식단을 제공해주었다. 오후에는 카페로 이동해 클라이언트 피드백 정리 및 수정작업을 했다. 일이 끝난 후에는 늘 근처 자연으로 향했다. 율포해수욕장에서 바라보는 석양, 조용한 다원 산책길은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데 탁월했다. 도시에서는 일이 끝나도 머릿속에 남아 있던 잔상이, 이곳에서는 자연 속으로 스며들며 사라졌다.
조용함의 진짜 가치: 보성에서 얻은 삶의 리듬
보성에서의 한 달은 단순한 ‘체험기’로 끝나지 않았다. 그 시간은 나의 업무 태도, 하루의 루틴, 사람을 대하는 방식까지 바꾸어 놓았다. 서울에서의 삶이 ‘정보’ 중심이었다면, 보성에서의 삶은 ‘리듬’ 중심이었다. 단순히 느리게 산다는 것이 아니라, 나만의 속도와 타이밍을 되찾았다는 느낌이 강했다.
물론 불편함도 있었다. 급히 인쇄하거나 회의를 위해 조용한 회의실이 필요한 상황에서는 대체공간을 찾기 어려웠고, 퇴근 후 문화생활을 즐길 인프라도 부족했다. 그러나 그 불편함마저도 불필요한 자극으로부터 나를 보호해주는 장치처럼 느껴졌다. 보성은 모든 것을 제공하지는 않았지만, 꼭 필요한 것만 남기고 나머지는 자연이 채워주는 구조였다. 디지털 노마드에게 완벽한 도시는 없지만, 보성은 그 중에서도 ‘자기 일에 몰입하고 싶은 사람’에게 최적화된 공간일 수 있다.
보성에서 일하는 삶은 단순한 여행지가 아닌, 일과 삶이 공존하는 진짜 공간이 될 수 있음을 알려주었다. 이곳은 내가 원할 때 언제든 다시 돌아와 재정비할 수 있는 리셋 공간으로 내 삶에 저장되었다.
'디지털 노마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월세 15만원, 강진 시골집에서 디지털 노마드로 일해보니 생긴 변화들 (0) | 2025.07.09 |
---|---|
소도시 디지털 노마드의 하루 루틴: 서울과는 완전히 다른 삶 (0) | 2025.07.09 |
정선, 디지털 노마드를 위한 조용한 피난처가 될 수 있을까? (0) | 2025.07.08 |
영주에서 디지털 노마드로 살아보니: 수도권 탈출한 프리랜서의 솔직 후기 (0) | 2025.07.08 |
속초에서 한 달 살기: 디지털 노마드가 본 소도시의 매력과 현실 (0) | 2025.07.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