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만 했는데, 왜 나는 점점 지쳐갔을까
서울에서 프리랜서로 일한 지 8년째 되던 해, 나는 더 이상 글을 쓸 수 없었다. 오전 9시에 노트북을 열고도 11시까지 아무 단어도 쓰지 못한 날이 반복됐다. SNS 피드에 올라온 누군가의 성공 소식에 위축되고, 끝나지 않는 피드백과 마감 사이에서 무기력, 무의미, 짜증, 외로움이 동시에 몰려왔다.
일을 그만둔 것도 아니었고, 소득이 줄어든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수입은 점점 늘고 있었다. 문제는 일이 나를 삼키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자유로운 삶을 원해서 프리랜서를 선택했지만, 결국은 매일 아침부터 새벽까지 일 생각만 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로 변해 있었다.
그해 가을, 친구 하나 없이 혼자 영등포 원룸에서 맞은 생일이 결정적 계기였다. 노트북을 닫고 천장을 바라보며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때 떠오른 단어는 이직, 창업, 휴식이 아니라 공간 변화였다. “서울이 아니라면 내가 좀 나아지지 않을까?” 그렇게 나는 생애 처음으로 소도시 이주를 계획하게 되었다.
한 달 살기로 시작된 소도시 체류, ‘몰입’이 돌아왔다
처음 선택한 도시는 강원도 정선이었다. 유명 관광지는 아니지만, 조용하고 산세가 깊은 지역이었다. 한 달 치 월세는 30만 원. 마당이 있는 시골집이었다. 마을엔 프랜차이즈 카페도, 대형마트도 없었지만, 대신 있었다. 하루에 몇 번씩 울리는 새 소리, 마당에 핀 꽃, 정오가 되면 밥 냄새가 나는 조용한 동네의 리듬.
나는 매일 아침 7시에 일어나 산책을 했다. 커피를 내리고, 오전 9시에 노트북을 열었다. 신기하게도, 서울에선 두 시간 걸려도 못 쓰던 글이 여기선 30분이면 초안이 나왔다.
의도한 건 아니지만, 디지털 노마드의 리듬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 오전 7시: 산책과 독서
- 오전 9시~12시: 집중 작업 (콘텐츠 작성, 편집, 정리)
- 오후 2시~5시: 미팅, 클라이언트 업무
- 오후 6시 이후: 요리, 산책, 마을 기록 남기기
이 루틴은 나를 다시 ‘살아있는 사람’처럼 느끼게 했다. 마감은 밀리지 않았고, 수입도 오히려 증가했다. 소도시에서의 체류는 업무 효율을 높였고, 더 중요한 건 “일 외의 시간에도 내가 존재하고 있다”는 감각을 되찾게 해줬다.
외로움이 아닌 ‘여백’을 배운 시간
물론 시골 생활이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혼자 밥을 먹고, 말도 없이 하루가 끝나는 날이 많았다. 인터넷이 느려 화상회의가 끊기기도 했고, 비 오는 날은 통신이 불안정해 업무에 지장을 준 날도 있었다. 서울에선 아무렇지 않게 해결되던 일들이 시골에서는 한 번 한숨을 쉬고 나서야 해결되는 일이 많았다.
하지만 그 모든 느림 속에서, 나는 하나씩 ‘속도를 낮추는 법’을 배워갔다. 하루 종일 해야 할 일을 반나절에 끝내고도 초조하지 않았다. 카페가 없어 직접 커피를 내려 마셨고, 사람이 없어 스스로를 더 자주 들여다보게 됐다.
가끔 시장에서 만난 노점 할머니가 “여기 오래 있을 거야?” 하고 물으면 이상하게 마음이 따뜻해졌다. “네, 아마도요.” 그 말에 담긴 정서가 도시에서는 느껴본 적 없는 감정이었다.
이곳에서는 사람을 처음부터 경쟁 상대로 바라보지 않았다. 일을 하지 않는 시간에도 자책하지 않았다. 서울에서는 일하지 않으면 도태된다고 느꼈지만, 여기서는 일하지 않으면 그냥 ‘쉬는 중’이었다.
다시 돌아갈 수도 있지만, 이제는 ‘선택 가능한 삶’
나는 지금도 한 달 단위로 지역을 옮겨 다니며 디지털 노마드 생활을 하고 있다. 어떤 달은 속초, 어떤 달은 봉화, 때로는 고흥. 서울도 가끔 올라가지만 예전처럼 ‘살기 위해’ 머무르진 않는다. 이제 서울은 필요할 때 머무는 곳, 내가 원할 때 떠날 수 있는 곳이 되었다.
무작정 서울을 떠난 것이 아니다. 더 나은 나를 만들기 위해, 나를 회복시키기 위해 공간을 바꾸는 결정을 스스로 내렸고, 그 선택은 삶 전체의 방향을 바꿔놓았다.
번아웃은 단지 일의 과다에서 오는 게 아니었다. 일 외의 시간이 없는 상태, 스스로를 돌아볼 틈이 없을 때 찾아온다는 걸 이제는 안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조용한 시골 마당에서 커피를 내리고, 노트북을 켜고, 다시 글을 쓴다.
서울을 떠난 건 도망이 아니었다. 내 리듬을 되찾기 위한 회복의 여정이었다. 그리고 이 삶은, 충분히 지속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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